태양은 농촌에서 뜬다./돌나라 한농 이모저모

대한일보 21세기 바보 지도자(가족경제 유무상통)

해와달 처럼 2014. 1. 27. 07:30

 

 

 


 

대한일보 - 21세기 바보 지도자

석선(石仙) 박명호 선생님, 주(酒)·색(色)·재(財)·기(氣) 초월한 신인(神人)

현대인에게 신선(神仙)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의미일까? 그 같은 이가 존재하긴 할까?
요즘 화제의 인물로 떠올라 세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석선(石仙) 박명호(72) 선생이다.

 석선 선생은 지난해 12월 17일 대구 경북대 강당에서 열린 식량안보·식품안보를 주제로 (사)돌나라한농복구회

(이하 돌나라한농)가 주관한 <대한민국지키기> 행사를 통해 부각되기 시작했다.

석선 선생은 종교단체인 ‘십계석국’이란 돌나라를 창설해 1980년부터 주기적 국제 말씀 세미나를 했다.

왕따, 폭력, 탈선 없는 대안학교인 초·중·고의 ‘돌나라한농예능학교’를 설립했으며, 부모 효도를 근본으로 삼는

 ‘부모효도하기운동’ 본부를 세웠다. 또한 ‘고려인돕기운동본부’를 설립해 매년 독립군의 후손을

이모저모로 돌보는 일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무공해 농사로 병든 먹을거리, 병든 땅, 병든 사람을 회복해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돌나라한국농촌복구회’를 설립, 국내뿐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브라질, 중앙아시아, 필리핀,

캐나다, 아프리카 케냐 등 10여 개국에 진출해 유기농업 기반을 다졌다.
이런 방대한 일들을 소리 없이 이끌어온 그는 어떤 지도자일까?

석선 선생은 모든 인간은 주색재기(酒色財氣)의 네 가지 담장 안에 갇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 네 가지 담장을 벗어나는 이는 신선(神仙)이라는 것.

주(酒)는 꼭 마시는 ‘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몸에 독이 되는 모든 음식들, 과식, 간식, 폭식도 아우른다.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술독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강의록 중 ??신선들의 음식??은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오랜 세월 완전한 자연식만을 고집해왔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색(色)을 떠나 살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을까? 색(色)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석선 선생은 거룩한 색(色)의 차원을 요구한다. 한 이불 속에 남녀가 벌거벗고 누워 있어도 생각으로도 죄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렇다고 색(色)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합법적인 부부 관계에서 신(神)이 주신 종족 보호 본능에 입각한 사랑의 행위는 거룩하다는 것이다.

타고난 미남으로 청년 시절부터 뭇 여성들이 따랐지만, 단 한 번도 허튼 마음 한 조각 흘리지 않았다는 그는 평생을 바보스러울 만큼 이성에 있어서는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왔단다. 그가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것이 간음죄다. 결혼한 자들은 오로지 내 아내만 여자로 볼 것이요, 내 남편만 남자로 볼 것이라고 했다.

현대를 일컬어 흔히들 물질만능주의 시대라고 한다. 돈이면 뭐든 통하는 세상이다.

재물을 위해 패륜도 서슴지 않는 세태에 석선 선생은 돌나라 내에서 인류 역사상 없었던 유무상통(有無相通)

정착화하는 중이다. 말 그대로 ‘네 것, 내 것’이 없는 경제개념이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식 경제개념이 아니다. 가족 경제개념 이라 할 수 있다.

우표 한 장 살 돈이 없을 만큼 극빈한 생활도 겪었지만 자신에게 생기는 것은 돈이든, 옷이든, 귀한 보약이든, 어떤 선물이든 주고 또 주는 생을 살아온 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는 오롯이 남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듯했다.

그 거대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세 자녀에게 물려줄 숨겨둔 유산 하나가 없단다.

석선 선생은 속리산 천황봉 산기슭에 조용히 묻혀 살고 있다. 자연계 속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그 속에서 진리도 터득한다고. 지게 지고 나무하는 것을 취미로 여겨 ‘나무꾼 선생’ 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 그가 명예나 권력에 연연해할 리 만무하다. 서로 짓밟고 피투성이가 될지언정 누구든, 무엇이든

 이겨야 하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산다. 그의 근본이념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

인간으로서 누구도 주색재기(酒色財氣)의 담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을 홀연히 초월한 사람.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사람.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흘러가는 고요한 물처럼 들레지 않고 겸허히 사는 사람. 석선 선생은 바로 현대에 사는 신선(神仙)이었다.

그가 걸어온 일생과 돌나라 한농 회원들의 수많은 증언들은 너무나 방대해 일일이 열거하기엔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이 남달랐던 아이

석선 선생은 1943년 충남 보령 성주산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 12시, 한 시골집 처마 끝에 떴던 세 개의 별이 핏덩이가 태어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는 훗날 임종 전에야 그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한가로운 시골의 풍경이 그렇듯 모두 일을 나간 빈집에 어린 명호는 홀로 남아 놀곤 했다.
어느 날, 심심해진 꼬맹이의 발걸음이 오이 텃밭으로 향했다. 길쭉길쭉 여기저기 누워 있는 오이가 먹고 싶어진 아이는 엄지손톱으로 오이를 꾹 찍어 맛을 본다. 상큼한 오이 향이 코끝을 찔러 사뭇 군침이 돌지만

“안 돼. 저녁에 아버지 반찬 해 드려야 해!” 한마디 남기신 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차마 따먹지는 못하고

손톱으로 여기저기 찍다 결국 오이만 곰보를 만들어 놓고 돌아섰다. 겨우 다섯 살 때였다.
그가 자주 지나다니던 길옆 옥수수 밭이 있었다. 커다란 옥수수가 영글어 주렁주렁 늘어져 있어도 남의 것인지라

단 한 개도 손대는 법이 없었다. 이를 안 옥수수 밭 주인아주머니가 기특하다며 한 바구니씩 가져다준 일도 있다.

쌀밥을 구경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 쌀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유했으나 그의 집도 보리밥을 먹었다.

오직 어린 아들의 도시락에만 쌀, 보리가 반반씩 섞인 반섞이 밥이었다. 어린 그의 마음에 보리밥을 드실

아버지가 걸려 학교에서 쌀밥 도시락을 남겨 와 “먹기 싫어 안 먹었으니 아버지 드시라”고 드리곤 했다.

또, 타고난 미남으로 처녀들이 줄을 섰지만 집까지 찾아오는 여인들을 피해 골방에 숨을 만큼

이성에 있어서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순진한 청년이었다.

인생의 전환점-하나님을 만나다

그렇게 여리고 순하던 그는 18세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튼실하게 태어났지만 어머니 유종으로 젖 대신 멀건 죽에 설탕을 탄 암죽을 먹고 자란 그는 유독 몸이 나약했다.

 5세에 천자문을 떼고 한번 본 것은 그대로 외우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나 심하게 나약해진 건강 탓에

중학교를 끝으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중3 때 극도로 건강이 악화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교회에 첫 발을 딛게 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했나 보라?(사40:26)는 한마디 성경 구절에 하나님을 알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18세였다. 이후 건강은 놀랍게 회복했으나 병이 치료되자

유교 집안의 엄격한 아버지는 신앙을 용납지 않았다.

자신을 죽음에서 낫게 해준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어 신앙을 선택한 대가로 26세가 되기까지 네 번의 가출을 당했다.

그러나 어렵고 궁핍한 가운데도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는커녕 명절과 생신 때마다 용돈과 선물을 부쳐 드렸다.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부모 효도하는 모습에 끝내는 완강했던 아버지 마음이 녹아져

그가 드린 성경책 선물까지 기쁘게 받으시기에 이른다.

오랜 세월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수한 고생과 궁핍이 따랐지만 그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시린 세월

카투사에서의 군 생활은 모든 면에서 1등이었고 모범 군인의 표준이었다.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남달랐던 그는

 군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사 노릇을 했다. 오죽하면 흑인 병사들의 시기, 질투를 샀을 정도였다고.
처음 신앙을 선택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난은 군 제대 후에도 이어졌다.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으로 보세품 헌 스웨터 판매, 냉차 장사, 구두 수선, 날품팔이, 땅콩 장사, 이·미용기구 도산매, 여름철 민박, 해수욕장 수영복 대여, 성서 판매 등 험한 일을 전전했다.


어떤 땐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똥통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없어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기차 난간에 매달려 간 일도 있었다.

또, 군산의 창녀에게 쓰고 있던 모자를 뺏겨 얼떨결에 창녀촌까지 이끌려갔다 지혜를 발휘해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26세에 일찍 결혼한 석선 선생은 이후 7년간 견디기 힘든 가장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극빈한 생활고와 영혼의 방황, 여러 가지 질병과 핍박으로 얼룩진 눈물의 시간들이었다.

부잣집 아들이 집에서 쫓겨나 생전 해보지 않던 공사판 막노동으로 입에 풀칠하는 세월도 지내야 했다. 우표 한 장 살 돈이 없었고, 명절에 고향 갈 차비가 없어 부모님을 뵙지 못해 스스로 천하의 불효자라 탄식하던 때도 있었다.

바보 석선 선생

결코 녹록지 않은 삶이었지만 자녀들 앞에선 그는 언제나 환한 얼굴이었다.
한번은 삼남매가 정성으로 6년이나 키웠던 양을 팔게 됐다. 자녀들의 자립심과 책임감,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키우게 했던 양이었다. 좋은 가격에 사주는 양 공연히 헛수작을 부리며 싼값에 사가려는 장사꾼의 말을 그대로 믿어 주고 훨씬 더 비싼 값을 받았어야 함에도 장사꾼이 쳐준 값에 팔았다.

그리곤 “장사꾼이 손해 보지 않게 해 달라”고 자녀들과 기도했다.

또, 한 동네에서 석선 선생을 이상하게 미워하고 괴롭히던 자의 병든 송아지를 사준 일이 있었다.

그자가 자신의 병든 송아지를 좋은 송아지인 양, 속이며 팔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위해 사주고는 그가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했다. 얼마 후 병든 송아지는 죽었고 그 송아지 주인은 미안해하며 석선 선생을 존경하게 됐다.

한없이 유순하고 바보스러운 그지만 그러나, 비리와 타협에는 털끝만큼의 양보가 없었다.

정부의 장려 아래 계약재배로 12만 주의 족제비싸리 묘목을 길렀다. 당시는 뒷돈 거래가 일반적인 때였다.

 그가 뒷돈을 건네지 않자 묘목을 전부 사가야 할 공무원이 2만 주의 묘목을 버려두고 가버렸다.

결국 남은 묘목을 모두 땔감으로 쓸 수 밖에 없게 돼 석선 선생은 엄청난 손해를 입어야 했다.

그토록 궁핍과 고난 속에 산 삶이었지만 그는 술수와 편법을 몰랐고 누구를 이용할 줄 몰랐다.

오히려 알면서 속아주고 당해주고 믿어줬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해마다 독거노인 집에 슬그머니 나무를 해 가져다 놓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1984년 지금의 거처지인 상주 화북면 장각골에 이주한 후 그 마을의 불우이웃돕기 일환으로 30년간 한결같이

100~200만원 상당의 밀가루, 쌀, 국수 등을 지원하고 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선물이든 재물이든, 옷이든,

귀한 과일이든, 심지어 몸에 특효가 있다는 산삼까지도 아낌없이 내주고 퍼줬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본래 이기심과 탐욕으로 찌든 것이 인간이거늘, 석선 선생은 남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듯했다.

그는 사람이 이기심만 없다면 5분 안에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머리 검은 짐승

그가 돌나라한농을 이끌어 오는 동안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45세에 뜻하지 않은 오토바이 사고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옥고를 치렀다.
오토바이 주행 중 갑자기 행인이 뛰어든 것이다. 다행히 행인은 다친 데 없이 무사했지만

석선 선생은 그를 집까지 데려와 정성껏 돌봐준 후 그가 원하는 대로 배상해주었다.

그 사고로 석선 선생은 왼쪽 빗장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 행인의 고소로 엄동설한에 생각지 않은 21일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석선 선생이 보게 된 감옥의 모습은 지옥이었다. 비참함 그 자체였다. 예전엔 ‘전과자’란 이들의 사정과

도울 방법을 몰랐지만 죄수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사정을 깊이 알고 위로해줄 수 있게 됐으며

바른길로 인도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오히려 감사해했다.

최근 가장 큰 사건이 있었다. 2012년 12월 8일 SBS의 모 시사프로그램에서 ‘탐욕인가 희생인가 - 창기십자가의 비밀’

이란 제목으로 돌나라한농 및 석선 선생과 관련된 내용이 방영된 바 있다.

23년간 돌나라한농 회원이자 석선 선생이 설립한 돌나라한농예능학교 교장을 역임한 A씨가 회원 탈퇴 후

 방송국에 제보했기 때문이었다. 돌나라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A씨가 돌나라한농예능학교 교장 재직 동안

엄청난 기만과 사기를 일삼아 4차례의 파직과 권고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갖가지 악행이 계속돼

결국 퇴출시키게 됐고, A씨는 그에 대한 앙심으로 보복성 허위 제보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2011년 7월 17일, 검찰에 석선 선생을 ‘강간 및 강간치상’ 죄목으로 고소했다.

1차의 검찰 수사와 검찰시민위원회의 조사까지 거친 2차의 검찰 수사 결과 석선 선생에 대하여

무혐의 결론이 내려지자 A씨는 대구고등법원에 3차 재정신청을 했다. 결국 재정 신청 사건으로까지

총 3차에 걸쳐진 이 고소건을 심의한 고등법원 판결은 지난해 11월 25일 역시나 ‘혐의없음’ 기각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3년간의 재판은 그렇게 무혐의 판정으로 최종 종결된 것이다.

석선 선생이 가장 혐오하는 죄가 ‘간음죄’다. 어려서부터 ‘저놈, 못된 놈’ 소리 한번 들은 적 없이 컸다는

그의 철칙은 ‘정조’와 ‘지조’다.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 있다. “남녀가 한 이불 속에 벌거벗고 누워 있어도 생각으로도 죄짓지 않아야 한다” 강의 중 늘 강조하는 말이란다.

한편, J대학교 인재개발원장에 최근 취임했던 A씨는 그의 자격론, 인격론, 자질론 등을 운운하는 비난 댓글이 일파만파 봇물처럼 터져 그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자 결국 사임했다는 신문 기사가 실린 바 있다.

새로운 비전을 열다

한 여인의 남편이자 세 자녀의 아버지가 된 석선 선생은 38세인 1980년부터 주기적 국제 말씀세미나를 열게 된다.

세상이 포기한 범죄자들부터 세상을 포기하려 한 사람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수한 이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감동 감화를 얻어 새 삶을 살아가게 됐다고 한다.


포도나무 전정하시는 석선 선생님


석선 선생의 저서로는 '새 세상의 주인들', '천국사람들', '백조의 일생', '일어나 성령을 받자!' 등 다수가 있다.
그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비전을 펼쳤다. 바로 유기영농체인 (사)돌나라한국농촌복구회

(이하 돌나라한농)의 설립이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발전했으나 몸은 병들고, 땅은 날로 피폐되고, 인류의 식탁은 독으로

 가득해 해결책이 막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피폐된 땅을 살리고 건강한 먹을거리로 병든 몸을 회복시키고 한국 농촌을, 더 나아가 지구를 살리자는

 취지의 (사)돌나라한농복구회를 세운 것이다. 돌나라한농은 1994년부터 ‘무농약·무비료·무제초제’의

 삼무농법을 하고 있다. “안 되면 (땅을) 갈아엎자!” 석선 지도자의 이 한마디를 절대적 기초로 삼고

완전 유기농법을 고집한 결과 지금은 무공해 식품 국제 인증기관인 ‘돌나라유기인증코리아’로

대한민국 유기농 인증의 40%를 처리하고 있다.

 아울러 비좁은 땅덩어리를 가진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농업에 진출한 지 오래다. 미래의 국가 식량대란을 내다보고 1999년부터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브라질, 중앙아시아, 필리핀, 캐나다, 아프리카 케냐에 진출해

영농단체를 설립, 해외 무공해 농업의 기반을 다졌다.

뿐만 아니다. 돌나라 내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무상통(有無相通) 만나실을 통해

‘네 것, 내 것’이 없는 가족경제실현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무상통.

언뜻 사회주의 경제개념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유무상통(有無相通)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란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잠시 주춤했던 시간을 지나

 최근 업그레이드된 유무상통으로 활발히 부활했다고 한다. 인간적인 어떤 제도를 두지 않고도 개개인 마음에서 우러나

 이뤄지는 유무상통. 분명히 개인 소유가 존재하면서도 공동 소유도 가능한 유무상통.

자신이 필요한 부분들은 구애받지 않고 쓰되 남을 위해 좀 더 아끼고 자제해 금전이든,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서로 공유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이뤄가는 중이란다.

 이기심, 이타심, 탐심을 버려야만 재(財)를 초월할 수 있는 일이다.

석선 선생은 세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일들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석선 선생의 좌우명

그가 살아온 평생이요, 주색재기(酒色財氣)를 초월한 그의 사상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시(詩)가 있다.

 그의 장남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것이란다.

아들에게 주는 좌우명(座右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어디를 가든지 부(富)나 명예(名譽)나
은총이나 칭찬이나 높음을 택하지 말지니라
부(富)보다는 빈(貧)이 나으며
영광(榮光)보다는 그늘이 나으며
유명(有名)보다는 무명(無名)이 나으며
보좌(寶座)보다는 의자가 나으며
높음보다는 낮음이 나으며
배부른 죄인(罪人)보다 궁핍한 의인(義人)이 나으며
아름다움보다는 초라함이 나으며
관심(關心)보다는 무관심(無關心)이 나으며
칭찬(稱讚)보다는 꾸지람이 나으며
은총(恩寵)보다는 먼발치 사랑이 나으며
완전(完全)함보다는 노력(努力)이 나으며
강(强)함보다는 약(弱)함이 나으며
지혜(智慧)보다는 미련이 나으며
총명(聰明)보다는 어리석음이 나으며
결혼(結婚)집보다는 초상(初喪)집이 나으며
영화(榮華)보다는 고요한 도(道)가 나으며
궁전(宮殿)보다는 초야(草野)가 나으니라
이것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가장 평안(平安)한 길이요
안전(安全)한 길이요
행복(幸福)한 길이요
생명(生命)의 길이니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네 평생(平生) 동안 이 말을 명심(銘心)하여
네 인생(人生)길을 가길 바란다.

일일청한(一日淸閑) 일일선(一日仙)이니라


석선 선생이 반드시 이루고 싶다는 꿈이 있다. 이루고 싶다는 세상이 있다. 가난이 없는 새 세상, 병이 없는 새 세상, 싸움이 없는 새 세상, 범죄 없는 새 세상, 불행이 없는 행복한 새 세상, 죽음이 없는 새 세상이다.
이 모든 것의 중심은 경천애인(敬天愛人)에 있다. 그의 근본이념이 그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석선 선생이 평소 즐겨 쓴다는 ‘一日淸閑一日仙’(하루를 맑고 깨끗하게 살면 그날의 신선이다.)은 혼탁한 세상을

사는 세인들이 한 번쯤 깊이 상고(相考)해 볼 만한 글귀이다. 현대 신선(神仙)의 예사롭지 않은 행보가 주목되는 가운데 석선 선생과 돌나라한농의 귀추를 지켜볼 일이다.

[출처] 대한일보- 21세기 바보 지도자